성남시 수정구 가천대학교 옆으로 난 태평로 고바위길을 오르면 성남의 도심 속 전통사찰 봉국사를 만날 수 있다. 봉국사가 도심 속에 위치한 이유는 광주대단지 개발로 시작된 성남의 도시화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다. 1968년부터 시작된 광주대단지 개발은 농경지가 위치한 평지보다 지가가 저렴하고 국유지가 많은 현재 수정구 일대 구릉 산지를 중심으로 택지가 조성되었다. 도시개발 전까지 봉국사는 영장산 중턱, 표고 100m 높이에 위치한 사찰로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사의 경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으로 인하여 택지 개발 대상지 안 성남의 역사문화유산은 영창대군묘를 포함하여 거의 다 이전되거나 사라졌다. 그래서 개발의 포화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봉국사는 잃어버린 문화유적의 위치를 가늠하는데에도 오늘날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봉국사는 조선 현종이 요절한 두 공주 명선공주(1659~1673), 명혜공주(1663~1673)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을 전후하여 전국 명산 태봉에 봉안되었던 조선 왕실의 태항아리 39개와 수도권 일대 명당에 자리했던 수 십기의 왕자 공주묘가 서삼릉 경내로 옮겨지는 화를 입었다. 성남시 영장산 봉국사 근처에 있었던 명선·명혜 공주묘도 이때 고양시 서삼릉으로 천장되었다.
현종은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숙종이며 3녀는 명선·명혜·명안 공주이다. 세명의 공주 중 십대의 초반 어린나이로 명선·명혜공주를 1673년 4개월 격차를 두고 같은 해 모두 잃었다. 두 공주 모두 부마를 정한 뒤 혼례를 앞둔 상황에서 연달아 요절했기 때문에 현종과 명성왕후의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다. 현종대 승려 백곡 처능(1617~1680)의 ‘백곡집’의 ‘봉국사신창기’에 자식을 잃은 국왕 부부의 부모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두 공주가) 부마를 맞으려고 하였으나 미처 혼인하지 못한 채 1년 사이에 서로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주상은 이들의 죽음에 애통해하시고, 왕비께서는 더욱 가슴 아파하심이 그치지 않았다. 저승길에 명복을 비는 것으로써 부처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장례를 마친 이듬해에 왕비께서 금강산의 승려 축존에게 명하여 두 무덤 밖 몇 리에 절을 짓게 하였고, 궁중에서 사신을 보내 감독하였다. 사찰이 완공되자 봉국사라는 현판을 내리고, 향불을 바쳐 공양하였으니, 이곳은 곧 광주읍에서 서쪽으로 10리 되는 성부산 아래였다. "
현종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계승하여 즉위 초 사찰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사위전(寺位田)이라는 토지의 면세 혜택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숭유억불의 기조를 지키고자 했던 현종이 자식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새로이 짓는다는 것은 정치적 도전과도 같았다. 실제 그러한 분위를 대변하듯 ‘봉국사신창기’에서 현종의 불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 이 절이 어찌 불교를 숭상하기 위해서 지어졌는가? 어려서 죽은 딸들이 가엽고 애통한 부모의 지극한 정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자들은 망령되이 유불이 서로 싸운다고 여겨 번번이 이는 왕가가 해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자지간이라는 하늘의 이치의 귀함은 비록 지존이라도 그 정과 사랑은 똑같다. 학식있는 군자가 봉국사가 세워진 이유를 듣게 된다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리니 어느 겨를에 한가롭게 유불의 시비를 다투겠는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생로병사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신앙을 성리학이 감당할 수 없었고 불교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던 불교에 대한 신봉은 왕실과 같은 지배층에서부터 일반 평민까지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왕실 관련 사찰을 살펴보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대부분이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사찰을 세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그것도 대부분 대군 등 아들을 위한 사찰이다. 남존여비의 조선에서 공주인 딸들을 위해 그들의 죽음 직후 바로 세운 사찰은 봉국사가 유일하다.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가 부모를 향한 자식의 효심을 상징하는 사찰이라면 성남의 봉국사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봉국사의 대광명전(경기도유형문화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경기도유형문화재)은 공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부처님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찰의 전각은 그 안에 모신 부처님과 연계되어 명칭이 정해지므로 대광명전 속 아미타불에 대하여 어색함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대광명전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다. 실제 1939년까지 봉국사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었다.
1929년과 193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봉국사 재산목록에서 비로자나불이 석가모니불과 함께 확인되며 1939년 ‘봉국사 이전 허가에 관한 건’에서도 봉국사의 전각은 대광명전과 나한전, 불상은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을 확인할 수 있다.
봉국사의 석가모니불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 삼청동의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은 최근 연구를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임이 밝혀졌다. 이 불상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두 불상 안에서는 1924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현재 성남)에 거주하고 있었던 석씨라는 여성의 극락왕생을 비는 축원문이 복장물로 발견되었다. 이는 두 불상이 봉국사에 함께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현재 봉국사 대광명전의 아미타불은 어디서 온 것일까? 봉국사의 현재 아미타불은 1939년까지 봉국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법륜사라는 사찰에서 모셔온 것으로 추측된다. 법륜사는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조대 창건된 사찰이며 1939년 서울 창신동 지장암으로 사찰 재산이 이전되었다. 그리고 법륜사 전각들은 해체되어 1938년 화재로 인해 사찰 건물의 상당수가 전소된 서울 삼성동의 봉은사의 재건 자재로 쓰였다.
1930년대 말 봉국사와 법륜사가 이전되는 혼잡한 상황 속에서 법륜사에 봉안되었던 아미타불이 현재 봉국사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봉국사의 아미타불 역시 현재 보물로 지정된 옛 봉국사에 봉안되었던 불상과 같은 양식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수연의 작품으로서 광해군의 왕비인 장렬왕후가 조성한 불상으로 보는 학계의 연구가 있다. 실제 그렇다면 봉국사 대광명전의 아미타불 역시 봉국사의 옛 불상들과 마찬가지로 보물급의 불상이다.
일제강점기와 도시개발이라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은 봉국사가 독립운동과 연결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의 기운이 1920년대 초까지 지속된 가운데, 일제는 3·1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9년 4월 15일에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공포하였다. 광주군 중부면 탄리(현재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거주자였던 김교상(1889~1946)은 1920년 12월에 ‘1919년 제령 제7호’와 출판법을 위반한 죄명으로 검거되었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검거 당시 그가 은거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회합을 가졌던 장소가 봉국사였던 것이다.
김교상과 동지들은 봉국사에서 전국에 지부를 둔 대한독립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구상하고 조직해 나가고자 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봉국사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찰의 이름에 ‘봉(奉)’자가 들어가는 경우 왕실과 국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역할을 한 봉국사는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에 이어 사찰의 이름 그대로 나라를 위한 충정의 역사가 서려 있는 전통사찰이다.
정은란 성남시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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